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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패션의 어머니·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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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자 디자이너는 1961년 국제복장학원을 설립, 앙드레 김, 이상봉 등 국내 패션계를 이끄는 디자이너들을 배출하며 한국 패션디자인계와 교육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 KoreaFashionNews

 

 

한국 패션산업의 선구자인 최경자는 한국 패션 현대화의 격동기인 1940년대와 전환기인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여성 패션스타일의 기틀을 구축한 제1세대 디자이너로 노라노, 서수연과 함께 한국 근현대 패션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11년 함경남도 안변에서 태어난 최경자는 원산 루시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무사시노 음대를 수료한 뒤 도쿄 오차노미즈 양장전문학교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귀국한다.

 

남성용 슈트를 제작한 양복점에서 여성용 양장이 제작되던 시기인 1937년 함흥에 여성전용 양장점 ‘은좌옥’을 열어 여성을 위한 서양복을 제안했다.

 

▲ 최경자는 디자이너란 말조차 없던 1930년대부터 국내에 ‘패션’의 씨앗을 뿌리고 가꿔오며 5만여 명의 제자를 키워낸 한국 패션의 어머니이자 역사다.     © KoreaFashionNews

 

국내 첫 디자이너·모델 학원 세워 패션 초석 다져

 

이듬해 대한민국 최초의 패션스쿨인 국제패션디자인아카데미(국제복장학원) 전신인 함흥양재전문학원을 세워 국내에서 처음으로 패션교육을 시작했다.

 

해방 후에는 서울로 내려와 1949년 국제양장전문학원을 설립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최경자양재연구소’를 설립해 체계적인 패션교육시스템의 체계를 구축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후 1961년 국제복장학원을 설립, 원장으로 있으면서 앙드레 김, 이상봉, 박춘무, 이신우, 박윤수, 루비나, 명유석, 한승수 등 국내 패션계를 이끄는 제2세대와 제3세대 디자이너들을 배출하며 한국 패션디자인계와 교육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49년 튜닉톱과 타이트스커트 착장의 밀리터리 룩을 선보이며 제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 패션의 트렌드를 한국에 전파하였다. 1954년 피난살이의 온갖 애환이 얽힌 3년간의 대구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명동2가 한가운데에 ‘국제양장사’의 문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양장점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명동은 다시 ‘유행1번지’라는 타이틀을 찾게 되었다. 당시 명동 외에는 뚜렷하게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데다가 워낙 물건이 부족하여 어떤 옷도 팔만 들어가면 무조건 팔리던 시절이었다.

 

겨울철에는 그 비싼 외산 수입 옷감으로 만든 코트도 하루에 50~60벌 이상씩 주문받을 만큼 호황을 누렸으며, 이 무렵 종로, 광교 등지에서 영업하던 양장점들이 속속 명동으로 자리를 옮겨 양장점 전성시대를 열었다.

 

국제양장사는 주로 고위층 부인들을 고객으로 삼아 성업을 이루었다. 김지미, 윤인자, 로경희, 안나영, 김 씨스터즈, 나애심 같은 당시 활약하던 많은 연예인들의 단골집이 되었다.

 

▲ <좌측부터>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의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청자’ 드레스 1962, ▲시폰 롱 드레스(노란색 배추꽃, 보라색 무꽃), 1966, ▲양단 이브닝드레스 ‘공작(Peacock)’ 1963  © KoreaFashionNews

 

1세대 대표 디자이너 한국 여성패션 현대화 기여

 

국내 패션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최경자는 1957년 10월 반도호텔 다이나스티룸에서 첫 번째 패션쇼를 선보이며 우리나라 패션쇼의 새장을 연다. 이날 발표된 50여점의 의상들은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으며 그 시대의 패션 리더들의 대표적인 의복이 되었다.

 

1959년 한국에서 처음 열린 국제 패션쇼에서는 한복의 무지개 속치마를 응용해 치맛단의 볼륨감을 살리고 이세득 화백이 옷감에 학과 소나무를 그린 청자 드레스를 선보였는데 의상에 예술성을 접목한 작품으로 오늘날까지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특히 ‘디자이너’라는 호칭이 없었던 시절 외국의 패션쇼를 보면서 복식계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복식 연구가들의 지위를 높여야 한다는 최경자의 철학은 오늘날 한국 디자이너의 배출과 디자이너라는 말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에도 우리 고유의 정서, 한복의 기본 요소인 깃선, 고름 등을 양장에 첨가하고 그 속에서 소재를 찾는 등 한국 전통문화와 문화재를 모티브로 작품을 전개하며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디자인의 시스템을 정립했다.

 

한국적 순수한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했던 ‘무꽃과 배추꽃’(1966), ‘달님의 시녀’(1964), ‘공작’(1963), ‘현재와 미래’(1973), ‘돈의 전설’(1988) 등은 최경자의 대표 작품으로 손꼽힌다.

 

▲ 1959년 국내 최초로 열린 국제패션쇼에서 참가한 최경자(앞줄 우측 3번째) © KoreaFashionNews

 

최경자는 개인적인 행보를 한 여타의 디자이너들과 다르게 한국패션계 인사들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1955년 ‘대한복식연우회’ 창설을 계기로 제1세대 디자이너 그룹의 리더가 되었고 1961년 창설된 한국 최초의 패션디자이너 모임인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의 창립 구성원으로 한국 패션디자이너들의 상생을 위한 다양한 행보를 보여왔다.

 

대표적인 사례로 1957년 한국 최초로 패션 바자 전시회를 도입하여 공동 수익 창출 시스템의 롤 모델을 구축하였고 이러한 행사 기획을 통해 디자이너 브랜드의 개념을 대중에게 전파시켰다.

 

또한 국내 최초로 1961년 스타일화과를 창설하고 1964년 패션모델 양성기관인 국제차밍스쿨을 설립했으며 미국 F.I.T, 일본문화복장학원 등 해외 패션스쿨과의 교류를 시도하며 우리나라 패션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1968년 국내 첫 패션월간지인 ‘의상계’를 창간하며 디자이너이자 교육자, 패션 언론인으로서 한국 패션의 토대를 만들었다. 또 1976년 한국여성경제인협회의 전신인 한국여성실업인회 초대회장을 맡았으며 한국 패션의 역사를 정립할 목적으로 ‘복식디자인’, ‘한국패션50년사’를 발간하고, 자서전인 ‘날개를 만드는 사람들의 어머니’ 등의 책을 쓰기도 했다.

 

▲ 최경자는 국내에선 처음으로 1963년 한·일 친선교류패션쇼를 서울과 도쿄에서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1973년 미국 순회 패션쇼를 여는 등 국제 패션교류 활성화를 위한 각종 활동도 벌여왔다. <좌측> 1963년 한·일 친선교류패션쇼 <우측> Bodyconscious evening dress, Kyung-ja Choi, 1957  © KoreaFashionNews

 

국내에선 처음으로 1963년 한·일 친선교류패션쇼를 서울과 도쿄에서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1973년 미국 순회 패션쇼를 여는 등 국제 패션교류 활성화를 위한 각종 활동도 벌여왔다. 지난 1993년에는 중국베이징복장대 명예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최경자는 디자이너란 말조차 없던 1930년대부터 국내에 ‘패션’의 씨앗을 뿌리고 가꿔오며 5만여 명의 제자를 키워낸 한국 패션의 어머니이자 역사다.

 

그러한 공로로 1985년 대통령표창 디자인부문 대한민국산업포장, 1989년 국무총리표창 모범여성경영인상, 1996년 정헌섬유산업상을 수상했으며, 1999년 국내 디자인 산업의 육성을 위해 처음으로 개최된 ‘제1회 대한민국 디자인대상’에서 석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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